인간은 대개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재미를 추구한다. 누구나 놀고 싶지만 아무 때나 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는 것처럼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다. 축구할 때가 가장 재미있고 행복하다는 영표, 지성 선수 이야기는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노동과 놀이가 한몸이 될 순 없다. 지성 선수는 집에 돌아오면 쉬면서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고 하지 않던가. 

놀이와 노동은 순환 구조를 지닌다.
놀이는 노동과 더불어 인간 조건의 핵심이다. 그래서 유희의 인간, 호모 루덴스라는 말도 생겼다. 놀이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놀이와 재미에 몰두하는가. 잘 일하기 위해서다. 왜 잘 일해야 할까. 잘 놀기 위해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처럼 그 둘은 끊임없이 반복한다. 놀이의 본질에 관한 힌트를 고대 희랍의 제례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제례는 축제 기간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축제 기간이 되면 고대 희랍인들은 노천극장에 모여 연극을 관람했다. 동틀 무렵부터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하루 종일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다. 오이디푸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을 때, 안티고네가 운명의 힘 앞에 당당히 맞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할 때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런 것은 노동하는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대 희랍인들은 축제를 즐김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고양했으며 한바탕 놀이판을 끝내면 뿌듯한 마음을 품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놀이는 여행, 즉 왔던 것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다.
가장 높은 정신적 경지를 가리키는 희랍어 테오리아(Theoria, 관조)의 어원은 ‘축제’, ‘축제사절’이며 또한 ‘여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은 여행을 떠나 축제에 참가하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놀이도 마찬가지다.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훌쩍 떠났던 여행은 대개 ‘그래도 집 만한 곳이 없지.’라는 독백으로 종결되기 마련이다. 여행의 본질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즈의 마법사>는 뇌 없는 허수아비와, 심장 없는 양철인간과, 용기 없는 사자가, 철없는 도로시를 만나 에머랄드성으로 가는 모험 속에, 있는 줄만 알았던 마법사가 없음을 아는 순간 없는 줄만 알았던 각자의 것을 발견하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이 흥미진진한 모험담은 놀이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긴 여정의 당사자인 도로시는 여행을 한껏 즐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전보다 부쩍 성숙해 있다. 놀이는 정신을 고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배우는 즐거움과 가르치는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또한 순환의 구조를 띤다.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즐거운 일이다. 공자님도 그런 즐거움에 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때로 학생이 되기도 하고 선생이 되기도 한다. 이 두 계기를 오가며 순환하는 과정은 삶을 윤택하게 한다.

놀이는 자기동일성을 경험케 하는 계기다.
정신의 고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정체성의 업그레이드다. 자기정체성을 한 단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동일성이란 무엇인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또는 “그 사람 이제 보니 완전 딴 사람이네.” 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동일성에 대한 표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동일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어 표현 셀프아이덴티티가 자기정체성 또는 자기동일성 둘 다 가리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스타워즈> 3편에서 파드메는 루크와 레아를 낳고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오비완 케노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스베이더가 됐어도 아나킨에게는 선한 부분이 남아 있다고, 그는 선한 사람이라고. 자기동일성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파드메가 옳았다. 아나킨은 결국 자기동일성을 회복했다. 자기동일성을 확인하지 못하면 자기정체성도 확립할 수 없으며 자기정체성의 성숙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놀이는 자기동일성을 경험케 하는 수단이요 정신을 고양하는 계기다.

자기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자신을 돌아본다. 반성이라는 말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에 앞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다. 돌이킬 반, 살필 성. 죽어라 일만 하면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별로 없다. 직장이라는 곳이 그렇게 만만한 곳도 아니고 반성할 여유를 주겠나.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무한도전이나 무릎팍 도사도 보고 가끔 조기축구회도 나가고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며 수다도 떨고 해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이 모든 놀이가 반성의 도구다. 나희덕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양말을 뒤집어도 바지를 털어도 모래투성이다 / 아이는 매일 모래를 묻혀 들어온다 / 그리고 모래알보다 많은 걸 배워서 들어온다” (“황사 속에서” 일부) 정신의 고양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들은 놀면서 큰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 죽은 학자 장 보드리야르도 놀이에 관한 저작을 여러 권 남겼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놀이를 중단하는 것은 놀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는 삶보다 더 진지하다. 놀이는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다.” 그는 놀이의 본질인 반복과 순환에 관해 말했다.

인터넷 공간의 재미지상주의는 놀이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다.
앞서 말한 놀이의 두 본질, 즉 여행처럼 왔던 것으로 되돌아온다는 점, 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자기동일성의 계기라는 점은 동일한 순환 구조를 띤다. 순환하지 않고 한쪽을 향해 치닫는 놀이들은 그 본질을 벗어나 있기에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축구장 난동사태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포털 사이트 댓글 게시판이나 디시인사이드 같은 사이트의 게시판을 보라. 오로지 재미만 좇는다. 일방적이며 선형적이다. 타인의 인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실 자극적인 말과 사진, 영상을 쏟아내며 때로 폭력적인 형태를 띠기도 한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재미지상주의는 놀이의 본질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여기에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는 여행으로서, 자기동일성의 계기로서 놀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놀이에 빠져 되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보고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런, 놀구 자빠졌네. 댓글 폭력에 대해 자기정체성의 분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진정한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재미를 주지만 재미있다고 해서 모두 놀이는 아닌 것이다. 포털 사이트가 우리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뉴스를 정보가 아닌 놀이로 탈바꿈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이 놀이가 되었으니 탈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온라인 게임이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콘솔 게임처럼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놀이를 인간에게 제공한다. 휴대 전화나 디지털카메라, 피엠피 같은 휴대용 디지털 기기들이 장난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놀이 도구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전혀 나쁠 것 없다. 문제는 그 기기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도구 의존 성향이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를 손에서 놓으면 불안함을 느끼며, 어떤 이들은 게임에 빠져 다른 일은 전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도구 의존, 놀이 중독은 놀이의 본질인 순환성과 배치된다. 그런 점에서 블로그 같은 인터넷 저작 도구는 놀이의 순환성을 고스란히 따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자신의 지난 기록을 보거나 타인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고, 타인의 블로그에 방문하거나 관심사를 공유하며 공동체 의식을 경험할 수 있다. 예전에 서울시에서 시청 공무원들에게 블로그를 쓰라고 권고한 일이 있다. 말이 권고지 강요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재미를 느끼며 자발적으로 즐겁게 꾸려나가는 것이 블로그의 동기요, 놀이의 본질인데, 놀이가 아닌 잔업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즐거움의 무게를 달아 보라.
놀이는 노동을 위해 존재하고 노동은 놀이를 위해 존재한다. 이 순환 구조는 행복이라는 가치로 수렴된다. 재미, 놀이, 유희, 쾌락 같은 말들은 모두 행복이라는 개념에서 파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일을 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논다. 이에 관한 서술을 플라톤의 저작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 저작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즐거움 자체는 좋은 것이며, 끝까지 즐겁게 산 사람을 잘 산 사람으로 간주한다. 즐겁다는 것은 좋다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대중들이 때로 눈앞의 즐거움에 현혹되는 것은 나중에 얻게 될 더 큰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나중에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즐거움이란 진짜 즐거움, 진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쾌락과 미래의 즐거움을 마음의 저울에 달아 보고 더 큰 쪽을 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조언한다. 이런 원칙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번잡한 거리에서 걸어가며 담배를 피는 애연가들이 있다. 본인은 즐겁다. 그렇지만 담배를 든 손을 아래로 내렸을 때의 높이는 어린이들 눈높이와 거의 일치하므로 담배가 아이들 눈이나 얼굴을 찌를 수 있다. 또한 담배 연기는 뒤에 오는 행인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저 혼자 즐겁자고 여러 사람 고생한다. 즐거움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가. 주관적, 개인적 쾌락과 객관적, 사회적 쾌락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윤리적인 문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놀이는 여행이다. 집으로 돌아와 일터로 나갈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우리는 즐겁게 논다. 타인의 행복을 갉아먹는 여행은 떠나지 말자. (격월간 <전파>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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