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에 관하여

context 2007/05/17 04:46
반성이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에 앞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돌아보지 않으면 뉘우칠 수도 없다. 자기동일성을 확인하지 않으면 자기정체성도 확립할 수 없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 알면 좋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올림픽 양궁대표팀이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식사를 했을 때 연합뉴스가 1보를 타전했다. “양궁대표팀이 오후 12시에 청와대에서 오찬을 가졌다.” 이 기사가 송고된 시각은 오찬 시작 이전이었다. 순서 무시는 찌라시의 덕목이다. 예정형이 확정형으로 둔갑하는 것은 인터넷에서 흔한 일이 돼버렸다. 미확정 정보는 확정형이라는 탈을 쓰고 웹을 휘젓고 다닌다.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에만 몰두하면 사기꾼 된다. 잘못된 번역문을 읽은 독자가 원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 먼저 정확하게 써야 쉽게 다듬을 수 있고, 쉽게 쓸 수 있어야 재미있게 쓸 수 있다.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면 비유나 은유는 떡칠과 다름없다. 글쓰기에는 이런 순서가 적절하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114에 전화를 걸면 상담원이 이렇게 전화를 받는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속이 느글거린다. 누구냐 너… 순서를 무시하는 대화는 늘 당혹스럽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셈?” 이런 말과 맥락이 같다. 운전자들이 도로에서 초보를 만났을 때 긴장하는 건 그들의 운전기술이 미숙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운전의 순서를 알지 못하기에, 그래서 타인에게 위험이나 결례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좌측 깜빡이를 켜는 일은 차선 변경에 앞서 "당신 앞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라며 먼저 말을 거는 거다. 일단 디밀고 좌측 깜빡이를 켜는 일은 방문 벌컥 열며 "들어가도 되지?" 라고 말하는 격이다. 깜빡이 안 켜고 불쑥 대화에 끼어드는 인간을 보고 우리는 경우없는 색히라고 욕한다. 순서를 아는 것이 대화의 기술이며 좋게 살아가는 순리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어느 석간지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순위를 매겼다. 영예스런 1위에는 "나중에 놀아줄게."가 등극하셨다. 그 다음 순위는 "엄마, 아빠 다시는 안 싸울게."였다. 다짐이 부질없다는 것은 애들도 잘 안다. 다짐하는 건 왜 부질없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것처럼 구라치다 보면 상호 신뢰를 무너뜨리기 십상이라서 그렇다. 그런 구라들이 지들끼리 얼키고설키며 불신을 조장하는 사태를 가리켜 뒤죽박죽이라고 한다.

교육방송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 김수철에게 어느 어린 관객이 물었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던 때도 겪으셨다고 들었거든요. 저도 그런 비참한 감정 느낀 적 있거든요." 김수철이 대답한다. "좋아하는 거 하는데 뭐가 비참해. 그런 거 느낄 새가 어딨어. 그냥 막 사는 거지." 김수철은 자신의 삶에 걸맞는 순서를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그리고 그 순서에 따라 성실히 살았다. 그렇게 물어본 어린 소녀가 철없어 보였을 것이다.

올바로 질문하면 문제의 반 이상은 해소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설사 잘못 질문했더라도 그게 틀린 순서는 아니다. 소녀는 순서에 관하여 곧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쪽팔려보지 않으면 우물안 자기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쪽팔림은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에 놓인 현상이다. 쪽팔림을 아는 건 추함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아름다워질 준비가 된 거다. 따라야 할 순서의 첫 단계를 완수한 상태다. 많이 쪽팔려서 다음에 쪽을 덜 팔면 더 아름다워진다. 무식한 줄 모르면 유식해질 수 없다. 그게 순서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프랭크 슬레이드(알파치노)가 찰리(크리스 오도넬)에게 말한다. "작은 것을 종합하면 큰 것을 알 수 있어." 이런 태도가 배우는 자가 따라야 할 순서다. 다이다이로 껀바이껀에 충실히 대처하는 자세. 그러면 나중에 체계를 터득할 수 있다. 자신이 언제 철들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성실하게 사는 인간만 철들 수 있다는 점이다. 작가 한승원은 이렇게 말했다. "꽃은 그것을 심는 마을에만 핀다."

정명훈 씨는 후배 음악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모범(example)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그는 자신이 따랐던 순서에 비추어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들 때, 확실한 현재 일을 조금씩 진전하면 불확실성은 그만큼 제거된다.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모를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순서를 알고자 하고 순리 대로 따르면 소소한 기쁨도 큰 행복이 된다. 내 앞에 놓인 작은 사태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언제나 먼저다. 이 사람아,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결정하는겨!

덧붙임)
이 글 쓰고 나서 느낀 점 : "공부를 게을리하면 도닦는 모드로 돌입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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