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음과 사랑

context 2008/04/08 10:40
삼성의 내부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씨를 옹호하며, 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참을 참이라고 증명하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장금이의 말처럼요.”(MBC <PD수첩> 2007. 12. 25.) 정상궁이 장금이에게 물었다. 어찌 홍시라 생각하느냐? 장금이가 대답했다. 예? 저는... 제 입에서는...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좋음을 주려고 했으나 아테네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거짓을 거짓이라 입증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참을 참이라 증명하는 건 도무지 쉽지 않다. 대전제의 오류요, 무지의 오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증명해야 하는 건 옳지 않다. 좋음에 관한 보편적 공감이 부족한 사회일수록 그렇다. 참됨은 참되기에 좋은 것이며 그것은 이유불문이다. 개천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흐르듯 참됨과 아름다움은 좋음이라는 큰길을 향해 뻗어 있다.

달동네 놀이터에서
코흘리개 꼬마들
미끄럼타기 바쁘다

미끄럼틀 계단을 종종종종 올라가
쭈룩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지 엉덩이가 해지도록
미끄럼탄다

너희들 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오느냐
아무도 묻지 않는다


- 김광규, “미끄럼” 일부.

아이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숭고할 정도로 순수하게 놀이에 몰입한다. 뭐가 그렇게 좋으냐,  묻는 건 어리석다. 놀이에 몰두하는 것, 온몸으로 좋음을 좇는 것은 이른바 합리적 판단과 거리가 멀다. 오로지 순수하다. [가장] 좋은 것을 향한 인간의 마음도 그러한 것에서 시작한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것, 물가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를 향해 달려가는 것, 사랑하는 이에게 뭐든 주고 싶은 것에 공리적 판단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거 하면 돈이 나오니 밥이 나오니, 이런 물음과 무관한 좋음은 인간을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경지로 끌어올린다. 당신은 왜 사랑합니까? 이런 질문에 사랑하니까요, 이렇게 답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있는가.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그 말, 나 역시 믿을 수 없다. 사랑은 조건 명제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참이 아니다. 참됨과 아름다움 역시 조건과 무관하다. 그러면 경험이나 합리적 판단과 무관한 좋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그것은 경험과 이성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경험과 이성으로 좋음을 발견한다. 원래 있던 좋음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한다.

선생은 학생에게 가급적 좋은 것을 펼쳐 보이는 사람이다. 좋은 것을 학생 스스로 판단케 하기 위해 보편적인 것의 위계를 보여주지만 분별하는 일은 학생의 몫이다. 훌륭한 대화술이란 잘 묻는 것에서 시작하고, 잘 물으면 좋은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이렇게 잘 묻는 게 학생의 일이다. 보편자를 발견하는 경험은 공감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 묻지 않으면 배움은 아무 소용없다. 묻는 순간 누구나 스스로 가르치는 입장에 선다. (敎學相長)

공부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추상적 연습이며 사랑은 좋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한 양상이다. 좋게 살기 위해서는 잘 물어야 한다. 왜 사는가? 이렇게 묻기보다 ‘어떻게 하면 좋게 살 것인가?’ 이렇게 묻는 게 참되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필연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의 여정에 불과하지만 인간은 자유 의지에 따라 시간을 초월한 좋음과 만난다. 좋음이 피안이 아닌 차안의 일이며, 진짜 판타지 또한 현실 속에 있음을 경험케 하는 사랑이란 그 자체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인생을 영원으로 끌어올리는 구원의 메시지다. 사람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통해 보편적인 좋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바라본다. 거기에 참됨도 있고 아름다움도 있다. 기적 같은 일이다. 좋음은 실재한다. 좋음에 관해 묻는 사랑 속에서 두루두루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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